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넬슨 만델라 (문단 편집) == 기타 == *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 위니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 게 사유였다고 한다.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결국 이렇게 노선 갈등 등이 겹쳐 이혼했지만, 2018년 위니가 사망한 이후엔 만델라 손녀들이 남아공 투쟁사에서 빼놓긴 힘든 그녀의 행적을 기념하는 등 그래도 영향력은 남아있는 모양.][* 만델라의 이혼과 관련된 말이 [[명언/결혼]] 항목에 하나 있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 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록...당연히 웃자고 하는 소리. 6개월만에 이혼하지 않았고 고문과 매질을 매일 당하지도 않았다. 만약 만델라가 진짜로 가혹한 고문이나 매질을 당했다면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은 진작에 흑인들의 폭동이나 내전으로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만큼 만델라가 흑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자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만델라는 총 3번 결혼했다. 위니는 2번째 아내였고 저 때 이혼하고 2년 뒤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 생몰년도: 1933년 ~ 1986년]의 아내였던 그라사 마셸 여사와 삼혼을 했다. 그때 나이가 무려 80세. *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당일에 증손녀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개막식에 불참하였다. 그런데 만델라의 조카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델라가 [[FIFA]]의 지속적인 경기장 참석 요청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조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매일 주치의로부터 만델라의 상태를 보고받아야 했고 가족들은 혹여 의사가 경기장 참석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릴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사실 FIFA는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엄청난 상징성을 팔아먹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증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91세 노인을 축구장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이후 폐막식에도 불참하리란 예상을 깨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였다. FIFA의 더러운 속내와는 별개로 관중들은 비록 10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부부젤라]]를 불면서 만델라를 환영하였다. *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등이 있다. 국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어로 번역해 1995년 처음 출판했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 [[에이즈]]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출소 당시까지만 해도 에이즈가 남아공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9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에이즈가 갈수록 퍼져 에이즈 환자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고 남아공의 성장잠재력과 평균수명을 갉아먹는 수준에 다다랐다. 재임 당시에 흑백화합 및 인프라 건설, 경제성장같은 여타 현황에 밀려 에이즈 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와 별개로, 당시 에이즈 운동가이자 가장 장수한 에이즈 환자인 [[은코시 존슨]]의 연설에는 찬사를 보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에이즈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퇴임 직후에 본격적으로 에이즈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금을 모금하여 에이즈 고아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에이즈가 문화질병이라며 약을 처방하는 제대로 된 대책 대신 주스 섭취를 권하는 등 삽질을 거듭하던 [[타보 음베키]]에게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라며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자신부터 전처 소생인 큰 아들을 2005년 에이즈로 잃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고, 비싸게 약을 팔던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까지도 했다. * 2016년 [[수능완성]] 영어책에 일화가 실리기도 했다. * 1996년 헌법 2조 9항의 인권선언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기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은 헌법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을 명시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는 결국 2006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이자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넬슨 만델라는 1990년대에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만델라가 옥살이를 하던 8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중들 사이에서 거짓 기억이 공유된 것. 여기서 [[만델라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 2018년 5월 16일, 스페인의 축구 클럽 [[FC 바르셀로나]]가 넬슨 만델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 리그의 챔피언인 마멜로디 선다운즈와 친선경기를 가졌다.[[https://sports.new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076&aid=0003254829|#]] 문제는 바르샤가 비록 리그 우승을 확정짓기는 했으나 영광스러운 [[무패 우승]]까지는 2경기가 남아있었다는 것. 더군다나 만델라의 생일은 7월 18일이라서 굳이 시즌 중에 친선전을 치룰 필요가 없었다. 이 친선전 때문에 37라운드 [[레반테 UD]] 원정은 [[메시]], [[피케]] 등 주요 선수들이 벤치에 앉거나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는 로테이션을 돌려야 했고, 결국 5:4로 패배하면서 무패 우승이 물건너가고 말았다. 이후 바르샤는 만델라컵에서 가볍게 승리했지만[[https://sports.new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055&aid=0000641027|#]] 일부 안티와 팬들에겐 "친선경기에 불과한 만델라컵을 무패우승과 맞바꿨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만큼 만델라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고 봐야 할지도. *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무가베가 백인 권력자들에 맞서 싸우던 독립영웅이던 시절과 달리, 독립 이후 [[독재자]] 겸 극단적 [[흑인우월주의]] 성향으로 타락하는 것을 보며 만델라는 살아 생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짐바브웨는 나라도 안좋은 상황에서 독재자까지 한명 더 상대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장녀인 제나니 노시츠웨 들라미니가 2019년 주한 남아공 대사로 부임했다. * 2020년, 막내 딸이자 주 덴마크 대사를 지낸 진지 만델라가 향년 59세로 사망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742809?sid=104|#]] 코로나19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유족들이 공개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753725?sid=104|#]] 2023년 9월 25일. 손녀 졸레카 만델라가 향년 43세로 사망했다.[[https://m.yna.co.kr/view/AKR20230926157900099?section=international/all|#]] * 2012년부터 발행중인 현행 [[남아공 랜드]] 지폐 앞면에 고정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 [[관]] 속의 넬슨 만델라 가짜 [[사진]]이 돌아다녔던 적이 있다. [[https://www.news1.kr/articles/?144949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